노동자·미혼모·성폭력·동성애 등 소재
국·내외 장·단편 영화 총 20여편 상영
개폐막작 '탐욕의제국' '마이플레이스'
남성감독 작품 폐막작으로 처음 선정

   
▲ 제9회 인천여성영화제 폐막작'마이 플레이스'의 한 장면

'제9회 인천여성영화제'가 오는 11일부터 14일까지 나흘동안 영화공간주안에서 개막작 '탐욕의 제국'을 비롯해 총 20여편의 국내외 장단편 영화들을 상영한다.

9회 여성영화제의 주제는 '세상을 향한 새로운 물결 파문(wave)'이다. 수면 위에 이는 잔물결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조금씩, 조금씩 역동하며 땅을 자극한다. 올해 9회 인천여성영화제는 세상을 향해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낼 다양한 영화들을 준비했다.

영화가 생겨난 후, 처음으로 여성과 소수자가 카메라를 들었을 때 그간 대상화됐던 그들이 촬영한 영상은 말 그대로 '파문'이었다.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영화와 그것을 만든 창작자, 그리고 관객이 9회 인천여성영화제를 통해 만나 다시 한 번 이 세상을 향해 새로운 물결들을 불러일으키길 파문을 일으킬 지 주목된다.

개·폐막작을 비롯해 이번에 상영되는 주요 영화들을 살펴본다.

# 개막작 '탐욕의 제국'(11일 오후 6시30분) 삼성반도체 피해자들과 그의 가족들의 끈질긴 투쟁기를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이미 사람이 사망했고 지금도 백혈병을 비롯해 다양한 합병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분들이 여럿이다.

물론 삼성은, 그리고 국가는, 산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부자기업답게 돈으로 회유할 뿐. 삼성반도체 여성노동자들의 억울하고 어이 없는 죽음은 자본이, 국가가, 여성의 노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2013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옥랑문화상 수상작이다. 이 영화 덕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메이저 후원사였던 삼성이 후원을 끊는 전례 없는 사례를 남긴 작품이기도 하다.

# 폐막작 '마이 플레이스'(14일 오후 6시30분) 한국사회가 정상이라 규정한 기준선으로부터 조금씩, 혹은 많이 비껴나 있는 가족들을 통해 정상성에 대해 질문한다.

인천여성영화제 9년 역사상 남성 감독의 영화를 폐막작으로 선정한 건 올해가 처음이다. 동생은 예전부터 있는 그대로 순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감독과는 다르게 세상과 많이 부딪쳤고 상처 또한 많았다.

이런 동생이 어느 날 임신한 몸으로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 동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스로 계획 하에 비혼모의 삶을 선택한 동생 덕에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가족들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영화는 단순히 한 여성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가족 전체의 회복과 성장을 다루는 동시에 정상 기준을 비껴간 '다름'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 ▲왼쪽부터 인천여성영화제 상영작'탐욕의 제국''해피이벤트''배드신''부모에서 부모로''아버지의 이메일''주시'의 한 장면

# '주시'(12일 오후 1시) 불안증을 달고 사는 재키와 대학졸업을 앞두고도 아무 대책 없는 과체중 루시는 단짝 친구다. 비디오가게에서 일도 함께 하고 나머지 시간도 종일 붙어 다닌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재키와 루시는 자신들의 정상성을 입증하기 위해 각자 남자친구와 직업이라는 목표에 도전하게 되는데……. 레즈비언은 아니지만 오히려 애인보다도 만족스러운 재키와 루시의 관계를 통해 사랑과 우정의 이분법에 대해 질문해 볼 수 있는 경쾌한 영화.

# '부모(不母)에서 부모(父母)로'(12일 오후 1시30분) 제목이 그대로 부모 되지 못한 이들(不母)이 부모가 되기 위해 고군부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그것은 이들의 신체적인 어려움 때문이라기보다는 세상이 장애인 부모를 바라보는 편견 탓이 더 크다.

감독은 장애인 부모에 대한 이 사회의 편견을 과감히 극복한 두 여성의 이야기를 친밀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의 카메라에 비친, 두려움을 뚫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들의 삶은 감동을 넘어 경외로 다가온다.(시각장애인을 위한 내레이션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이 포함된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작품이다.)

# '엔딩노트'(12일 오후 4시) 예상치 못한 죽음을 앞 둔 아버지, 스나다 도모아키는 그 순간 슬픔을 택하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과 하지 못했던 일을 꼼꼼하게 적어 매우 밝고 담담하게 죽음을 준비한다.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믿기, 야당에 표 찍어주기, 가족들과 여행가기 등 그가 엔딩노트에 적은 일들은 매우 소소하고 위트가 넘친다.

그의 딸인 감독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친밀하게 담아낸다. 이 영화를 보며 많은 이들은 죽음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지금을 바라보게 할 것이다. 이 영화가 가진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천여성영화제에서는 이 영화 상영 후, 본인 스스로 유언영상을 찍어보는 이벤트를 진행할 예정이다.(배리어 프리).

# '해피 이벤트'(12일 오후 4시)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낭만적인 생각으로 임신을 하게 된 바바라가 겪는 몸과 마음, 영혼의 갈등을 다룬 영화. 지금까지 나온 영화 중 이토록 임신, 출산, 양육에 관해 밀도 있고 세밀하게 그린 작품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해피 이벤트>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며 섬세하다.

혹여 '남성감독이 섬세해 봤자'라는 편견을 갖고 계신 분이 있다면 그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영화에 집중하시길 권한다. 레미 베잔송 감독은 섬세한 연출력으로 작품을 끝까지 치밀하게 밀고 나간다. 해피 이벤트라는 제목이 주는 아이러니도 작품의 탁월함에 한 몫 더한다.

# '가면놀이'(12일 오후 7시30분) 아동성폭력 피해자의 어머니에 초점을 맞춘 감독의 카메라는 단순한 사건으로서 성폭력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견고한 가부장질서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자식의 고통을 온몸으로 앓으며 '자식 간 수도 제대로 못한 어미'라는 비난 속에서 어쩌면 자식보다 더 심각한 피해자가 돼버린 한 어머니의 증언은, 가부장사회에서 여느 범죄와 달리 피해자가 비난받고 가해자가 보호받는, 도덕 바깥의 범죄인 성폭력의 본질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 '고백'(13일 오후 1시) 아이들은 고백한다. 자신들이 당했던 성폭력의 상황들을. 보통 이럴 경우 얼굴을 가리거나 목소리를 변조하는 등의 장치가 필요할 것 같지만, 얼굴을 드러내고 아이들은 차분하게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이 영화의 의미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스피크아웃(Speak out, 성폭력 피해자 스스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드러내는 것)은 말하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에게 큰 용기를 준다.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자신의 피해경험을 떠올리며 '고백충동'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 '나 나 나: 여배우 민낯 프로젝트'(13일 오후 4시) 여배우들은 평소 어떤 모습으로 지낼까?

여배우들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자신의 모습을 찍기 시작한다. 김꽃비는 '똥파리'를 통해 만난 영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해외로 떠나고, 서영주는 영화촬영을 쉬면서 공연과 조연출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지구의 건강을 고민한다. 양은용은 사랑하는 이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아 괴로워한다.

여배우들이 스스로 찍는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통해 영화 이면에 담긴 그녀들의 삶과 고민들을 만날 수 있기를.

# '잔인한 나의, 홈'(13일 오후 4시30분) 돌고래는 친부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그녀는 가족에게 말하지만 돌아온 것은 미쳤다는 비난뿐이었다. 의지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가족과 싸울 수밖에 없는 돌고래의 고군분투는 그래서 슬프고 먹먹하다.

아오리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곳곳에 묻어있는 이 영화는 친족성폭력 피해자의 보기 드문 용기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영화 중반 밥 말리의 'No woman No cry'를 들으며 울먹이는 돌고래의 모습과 1심이 끝난 후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부모의 뒷모습은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영화는 말한다.

용기를 내어 부딪쳐 보면 그대들을 돕는 그대들의 새로운 가족이 탄생할 거라고.

# '모래가 흐르는 강'(13일 오후 7시30분) 내성천을 따라 천천히 흐르는 지율스님의 걸음을 뚜벅뚜벅 따라가다 보면 비로소 강이 보이고 모래가 보인다.

국가와 대기업이 합심해 벌이는 토목공사가, 혹여 토건 개발의 콩고물이 내게도 떨어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욕심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앗아갔는지가 보인다.

강은 우리에게 맨발로 걸을 수 있는 모래밭을 주었지만 우리는 모래를 걷어내고 강을 학살했다.

학살당한 강바닥이 드러낸 거친 자갈밭과 녹조를 보며, 그제야 '모래가 흐르는 강'의 의미를 깨닫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지금이라도 이 어리석음을 깨닫지 않는다면, 강이 스스로 회복하고 치유할 수 있는 일말의 기대마저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기에 이 영화는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화다.

# '동구 밖'(14일 오후1시) 좋은 곳으로, 편리한 곳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당연함으로 인해 우리가 잃는 것은 무엇일까? '동구 밖'은 동구 밖으로 나가려는, 송도로 이전하려는, 감독의 모교 박문여고에 관한 다큐이다. 영화는 그 과정을 여성감독 특유의 감성으로 아련하고 따스하게, 때로는 차디찬 현실의 상황을 서늘하게 보여준다.

모교와 동구에 대한 사랑이 곳곳에 묻어 있는 이 영화는 감독의 다양한 고민들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젊은 감독의 진정성이 읽히는 매우 따뜻한 다큐멘터리다.

# '배드신'(14일 오후 3시30분) 진홍은 20대 중반의 여배우다. 단역을 전전하던 진홍에게 베드신 역할이 주어진다.

현장에서 '수퍼 을'일 수밖에 없는 단역 여배우 진홍. 영화는 노출 연기를 앞둔 그녀를 둘러싼 현장의 폭력적인 상황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불안에 떠는 진홍은 '슈퍼 을'일 수밖에 없는 이 시대 많은 여성들의 삶을 대변하는 듯해 보는 내내 가슴 아프고 답답하다. 진홍의 가슴을 친친 동여맨 청테이프는 그 고통을 배가시킨다.

# '아버지의 이메일'(14일 오후 4시30분) 언뜻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한 딸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 영화는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낸 우리의 부모세대와 그 다음세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컴퓨터를 배워 둘째딸(감독)에게 40여 통의 이메일을 보낸다.

아버지의 이메일은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사진과 유품, 마지막에 남긴 40여 통의 이메일로 목소리를 대신하고, 살아있는 가족들은 자신의 기억으로 망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과정은 자신의 아픔도 동시에 들춰내는 것이므로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인천여성영화제 070-7579-3080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