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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지폐에는 대개 그 나라가 국가적으로 기리고자 하는 역사적 인물이 등장한다. 우리나라 지폐에는 세종대왕, 이율곡, 이퇴계, 신사임당의 초상이 '표준 영정'이란 이름으로 인쇄돼 있는데, 그 얼굴 모습이 그랬을 것이라 상상해 그려낸 것이라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반면에 일본 지폐에는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인물상이 등장한다. 현행 1만 엔에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5천 엔에는 교육자 니토메 이나조, 1천 엔에는 소설가 나쯔메 소세끼이다. 그러나 1963년 1월에 나온 구 1천 엔짜리엔 흰 수염의 '이등박문'이 도안돼 있었다. ▶일본은 그를 국가적 인물로 내세우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나 안중근의 궁극적 목적은 동양 평화 유지에 있었다"고 한 안 의사의 진술(참조.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 이기웅 엮음, 열화당 발행)에서 드러난 그의 죄악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거의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를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 공신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행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아직까지도 이등박문을 용서할 수 없는 '국적(國賊)'으로 여겨 매우 싫어한다는 사실에 대해 오히려 놀라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유쾌하지 않게 떠오르는 대목은 이등박문이 인천에까지 발을 뻗쳐 오욕의 흔적을 남겼다는 점이다. 1908년 5월 17일 개항25주년과 1933년 10월 8일 개항50주년 축하회에서 "인천 개항은 제국의 위업"이라며 떠들어 댔고, '인천'이란 제목으로 칠언절구를 남기기도 했다. ▶1939년엔 땅이름에도 등장했었다. 일제가 지금의 부평구 구산동을 엉뚱하게 '이등정(伊藤町)'이라 한 것이다. 광복 후 시지명위원회가 이를 되돌려 놓았는데, 최근 아베 일본 총리가 그 '이등'을 "한국인들도 존중해야 한다"고 또 섣부른 망언을 했다고 한다. ▶역사적 기억 보존을 위해 안중근 의사의 거사 장소에 표지석을 세우자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중 제안에 대한 반응인데 꽤 유치해 보인다. '국적'을 '존중'해 달라는몰염치한 강변이 국제사회에 통할 리도 없지만, 그 속내가 괘씸하기 짝이 없다.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