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환 박사의 인천사 산책-2

   
▲2013년 1월31일 오후 40여년의 역사를 지닌 인천시 남구 선인체육관. 지난 1973년 동양 최대 규모의 체육관으로 건설된 인천 선인체육관이 현재 도화지구 재개발에 따라 수많은 추억과 기록과 역사를 담은 채 철거되고 있다.  /인천일보 자료사진


인천시 남구 도화동 235번지에 위치한 선인체육관. 일명 '맘모스체육관'으로 더 널리 알리진 이 체육관이 8월3일 폭파·해체된다고 한다.

1973년 10월 준공된 지 40년 만에 그 '위용'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1970년 4월에 착공돼 만 3년6개월의 공사 끝에 완공된 맘모스체육관은 개발독재시대 인천의 '랜드마크'이자 역사적 상징이었다.


지금은 어느덧 사라져버린 수사지만 맘모스체육관은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실내체육관, 그것도 축구와 야구를 빼고는 그 어느 국제스포츠 경기라도 실내에서 다 치를 수 있도록 다목적 '스포츠전당'으로 건립됐다.

지을 당시 정식명칭은 '인천체전 실내종합경기장'.

실내에 육상 400m 정식 트랙까지 갖추도록 설계된 이 실내종합경기장은 서울 장충체육관보다 무려 3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당시 돈으로 20억원의 총공사비와 연인원 27만명이 투입됐다.

"이 매머드 실내체육관은 선인학원 백인엽(白仁燁) 이사장의 필생의 꿈이 담긴 것으로 각종 국제대회에서 금메달 획득의 요람으로 될 것"을 목적으로 건설됐던 것이다. <동양 최대 다목적 '스포츠전당' 인천체전 매머드 실내종합경기장-경향신문 1973. 6. 14>


1923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한 백인엽 장군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국군 사상 최연소인 27세의 나이로 사단장에 올랐다.

일제 말 일본 명치대학 경제과와 일본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한 그는 형 백선엽(白善燁) 장군과 함께 6·25전쟁이 낳은 불세출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1955년 중장으로 진급한 이후 1960년 4·19직후 육군중장으로 예편하기까지 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20년생인 백선엽 장군은 1940년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해 1943년 간도특설대로 임관한 이후 독립군 제거에 앞장선 친일 전력을 갖고 있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한 백선엽은 만주에서 귀국해 국방경비대 중위로 임관했다.

여순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박정희를 구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그 또한 6·25전쟁이 발발하자 1사단장으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육군참모총장까지 오른 그는 동생과 마찬가지로 1960년 4·19 직후에 예편한다.
 

   
▲ 2013년 8월3일 폭파·해체될 선인체육관의 전경. 몸통은 사라진채 양쪽 기둥만 남은 '맘모스체육관'의 마지막 모습이 애처롭다. /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1961년 5·16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보은으로 외교관으로 등용된 이래 교통부장관에 오르는 등 정부 고위관료로 승승장구했던 형과 달리, 동생 백인엽 장군은 "6·25전쟁을 치르면서 군인 자식들이 배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6군단장으로 재직하면서 1958년 성광학원을 인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학원설립 이념을 높이 평가했다고 하니, 음으로 양으로 도움이 컸을 터이다.

1964년 형과 자신의 이름 가운데 글자를 따 학원재단명을 '선인학원(善仁學園)'으로 개명한다.

백선엽의 호 '운산'과 자신의 호 '운봉'을 따 학교를 세우고, 어머니의 호를 따 '효열'국민학교를 설립하고, 학교 확장을 위해 중국공동묘지와 인근 민가를 훼손하는 등 '불도저' 확장을 거듭한 끝에 1979년에는 인천공과대학, 오늘날 인천대학교까지 건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1981년 선인학원을 둘러싼 갖가지 비리가 터져 나오면서 백인엽은 이사장직에서 사임하고 선인학원은 종국에 시립화됐으니, 개발독재시대 인천의 한 역사가 그렇게 저물었던 것이다. <선인학원의 제왕 백인엽 흥망사 -월간조선 163호, 1993년 10월호>


가난과 굶주림을 딛고 우리도 이제는 후진국 대열에서 벗어나 비로소 '동양 최대'를 꿈꾸던 그 시절, 국민적 비원을 개발독재의 욕망으로 변형시켜 탄생한 '맘모스체육관'에서는 유독 배고픈 헝그리복서들의 분투와 영욕이 가득했다.

이제 40년만에 또 다른 부동산개발의 욕망으로 '맘모스체육관'은 사라지지만, 이 건물에 얽힌 인천사람들의 애증과 개발독재시대 인천의 탁류와도 같은 역사까지 망각 속에 버려둘 수는 없다.

어느덧 지금 우리는 '세계 최고'라는 허상의 '맘모스체육관'을 짓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되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