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일어나지 않으려는가. 세월호 참사로 나라가 '패닉상태'다. 실종자 가족들은 기약 없는 혈육을 향해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섬뜩하다 싶었던 내 예감이다. 며칠 전 케이블 방송에서 마주친 화면이 10여 년전 감상했던 영화 타이타닉 장면. 당시 격한 감동을 받았던 터라 애써 채널을 돌렸다. 그런데 이 무슨 변고인가. 이틀 뒤 긴급뉴스는 세월호 침몰소식을 전했다. 놀랄 수밖에. 비록 시차는 있을망정 102년 전 타이타닉 참사와 겹치는 날이었으니. 이후 전원구출 소식은커녕 갈수록 사태가 혼미해 실망이 분노로 바뀌지 않았던가. 불가항력의 천재지변이라면 최선을다한 끝에 운명을 받아들일 체념이라도 할 법하다. 하지만 사건 이후 책임부서의 더딘 대응이 벌거숭이를 보는 듯 답답하고 민망하다.
비단 이번 참사뿐이랴. 대형사고 전후에는 이상증후가 따른다는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을 등한한 자업자득이다.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지탄의 대상인 문제 선장이 보이는 낯 뜨거운 행태가 이를 웅변하는 상징적 보기다. 전원 탈출의 마지막을 확인할 의무이행은커녕 첫 구출대열에 변복을 하고 나왔으니 기가 막힌다. 무릇 사람의 탈을 쓴 의인(擬人)과 정의감이 강한 의인(義人)이 있음을 이번 사태로 절감한다.
영화 타이타닉 침몰 장면을 보노라면 창문마다 불빛 휘황했던 바, 이는 작위적 연출이 아니었다. 후미진 기관실 화부(火夫)들이 발전을 위해 목숨을 던져 이룩한 빛이었던 것이다. 이래서 타이타닉의 장엄한 피날레가 거듭 상기되는 까닭이다. 가라앉는 배와 운명을 같이한 선장은 물론 자리를 뜨지 않았던 실내 현악연주는 천상의 울림이었다.
의인(義人) 타이타닉 선장 스미스의 고향에 세워진 동상에는 그의 마지막 말이 새겨져 있다. "영국인답게 행동하라"(Be British). 곧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의무를 다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이다. 그렇다면 우리 꽃다운 학도들의 넋을 위무할 위령비를 세운다면 무슨 구절을 새길 것인가. 특히 인천은 이번 항해의 출발지이자 희생승객 대부분이 안산 단원고교생이라는 점에 유의하자.
인천에 합동분향소를 설치 한다 함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이후 유가족과 생존자를 위해 심리치료를 하듯 구멍 난 위기상황 재정립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울러 필히 짚고 넘을 유념사항이 있다. 이번 사태에서 일신의 안위를 개의치 않았던 의인(義人)을 기려 꺼져가는 긍지를 되잡을 지표로 삼자 함이다. 그렇다고 지나친 관여로 과민해진 피해자의 자격지심에 흠집을 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 흘린 눈물로 먹먹해진 가슴을 다독거릴 다정한 손길이 이어져야 한다. 비통한 소식이 나올 때마다 모두 내 일처럼 눈시울을 적셨거늘, 까맣게 타버린 해당 가족의 심정이야 오죽 할까 보냐.
폐일언하고 싹 트고 꽃 피는데, 껍질 벗기는(脫殼) 아픔을 감내하듯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의인(義人)은 가지 끝에 물 올리는 뿌리만큼이나 힘겨운 자연의 섭리를 닮은 존재이다. 그래서 순리를 역행하기 일쑤인 복지부동 지도층 의인(擬人)을 척결함이 시급한 과제다.
4월 봄날이 온 겨레 눈물 속에 저물어 간다. 시인 김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고 읊었다. 부디 희생자와 유가족의 슬픔을 거두어갈 찬란한 미래를 구축하기에, 깊은 성찰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