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원 우크라이나 키이브국립대 교수.
▲김석원 우크라이나 키이우국립대 교수

여기 말로 '범쥐(Бомж)'라고 부르는 노숙자(거지)가 있었다. 오래전 어느 날 산책하다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냄새가 나고 꼬질꼬질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도와주고 싶어서 “네가 태어났을 때 너의 어머니 아버지는 아들 태어났다고 기뻐하셨을 텐데 지금 너의 모습을 보신다면 마음이 아플 것이다. 일하고 싶은 생각 있냐?” 고개 끄덕이는 그를 개인사업자에게 소개해 주었는데 그 후 회사 허드렛일을 하며 노숙자 생활을 벗어난 사람이 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넝마주이도 있었고 “밥 좀 주세요” 하는 거지들도 있었다. 전쟁 후 그리고 나라 전체가 가난하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지만, 고아도 많았고 걸인도 많았다. 특히 큰 망태기를 메고 집게로 휴지며 폐품을 줍는 넝마주이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어두워지면 밖에 나가기 꺼렸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1960~70년대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의 한 공화국으로 평균임금이 200~300루블, 미화로 400~500달러가 넘었다. 농산물이 풍부하고 모든 물가가 싸서 살기가 좋았다고 말하는 노인들이 아직도 많다. 외면적으로는 거지나 노숙자도 없었고 범죄 매춘 마약이 없다고 정치선전을 했다. 우리나라 평균임금이 100달러도 안 되던 시기이다. 친하게 지내는 역사학자 올레그 선생은 1960∼70년대 남한은 가난·독재·범죄·미군 고아의 상징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전쟁을 2년 넘기며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여기저기 보인다. 키이우는 요즘 가끔 공습경보는 울리지만, 전쟁 전과 비슷하다. 600~700km 떨어진 곳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만 수도에서는 거의 모든 대중교통이 정상화되었고 상점이 문을 열었고 학교도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지만 지하철역에서 자는 사람이 늘었고, 버스정류장 근처나 가게 앞에서 구걸하는 노인들이 많다. 특이한 것은 종이컵 하나 놓고 몇 시간이고 서 있다 사라진다.

특히 동네마다 쓰레기통 뒤지는 사람이 많아졌다. 키이우는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지 않아, 음식물과 일반쓰레기 구분 없이 버리는데 멀쩡하게 차려입은 사람도 있고 부부가 함께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도 있다. 이틀에 한 번 새벽에 쓰레기차가 한차례 지나가면 초저녁부터 쓰레기통 뒤지는 사람이 자주 오간다.

우리나라에도 폐지나 박스 줍는 노인이 있지만, 여기는 노인뿐만 아니라 중장년 심지어 청소년들도 폐지나 빈 병을 줍고 고물상에 판다. 전선 근처에서 키이우로 피난 온 사람들인지 남루한 옷차림으로 비닐봉지와 낡은 가방을 들고 다니며 시내 공원을 배회하고 벤치에 누워서 잠자는 사람이 있다. 맥도날드 KFC 등 패스트푸드점 근처에서 남긴 음식을 먹는 사람도 눈에 자주 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젊은 여성들 화장이 짙고 기묘한 복장을 하고, 날씨가 더워지니 심한 노출을 하고 다닌다. 거리에서 흡연하거나 음주하는 청소년도 있다. 어두워지면 여기저기 모여 소란을 피우는데 경계하고 주의해야 할 애들이다. 이전에도 젊은이들 문신이 있었지만 요즘 머리부터 발까지 험악한 문신이 심해졌다. 대학에서는 학생들 출석률이 전쟁 전보다 훨씬 떨어진다. 대학교에 왜 안 오냐고 물으면, 먹고 살기 위해 아르바이트한다니 할 말이 없다.

전쟁 후 주변의 여러 사람이 돌아가셨다. 많은 의사와 의약품이 전선으로 나가면서 병원 사정이 열악해져 살릴 수 있는 사람들도 죽는다는 소문이 흉흉하다. 전쟁으로 힘없고 나이 든 사람과 경제력 없는 사회적 약자들이 빈곤으로 몰리고 있다. 연금 생활자들의 연금은 줄어들고 물가는 오르니 살길이 없다. 청소년들은 무관심과 사회적 격변으로 무방비로 탈선에 노출되어 있다. 전쟁은 전선의 군인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힘없고 선량한 백성을 죽이고 있다.

/김석원 우크라이나 키이우국립대 교수